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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인물탐구

체조 도마의 신 양학선

세계를 공중에서 3바퀴 돌려버린 양학선 

 

오림픽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 꺼리와 즐거움과 감동을 줍니다.

여기아름다운 청년의 감동스토리가 있습니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남동 마을회관'이 나온다.

밭 옆으로 비닐하우스가 덩그러니 서 있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런던올림픽 체조 남자 도마에서 7일 한국 체조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양학선 (20·한체대)의 부모가 여기서 산다.


 

광주광역시 달동네에서 미장일, 공장일 하며 어렵게 살아온

부모는 2년 전 양학선이 보태준 돈에 평생 모은 돈을 합해

고창군에 밭 1만㎡를 샀다. 동네에 작은 집터도 마련했지만

아직 집을 새로 짓지 못해 밭 옆에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우리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 거 아들한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우리 아기'가 자기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다고,

인터뷰 많이 하라고 하데요."

 

 

지긋지긋했던 가난

양학선이 자라난 곳은 광주광역시 서구 양3동의 달동네다.

단칸방에서 형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양학선이 일곱 살 때 원래 살던 동네가 개발되면서 오갈 데가

없어지자 마을 통장이 '빈집이 있으니 들어와 살라'며 공짜로

내줬다고 한다.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가 공장일·식당일 등 닥치는 대로 일해도

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텀블링 잘하던

소년 양학선에게 체조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특별한 장비가

필요없어 큰돈이 들지 않는 운동이었다. 학교에서 합숙 생활하며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가끔은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밥벌이에 바쁜 부모 대신 양학선을 정성으로 보살핀 사람이

광주체중·고에서 6년을 함께한 오상봉 감독이었다.

오 감독은 합숙 훈련이 없는 주말이면 양학선을 자기 집에

데려가 먹이고 재운 날이 많았다.

중2 겨울방학 어느 날 양학선이 정말 체조를 그만두겠다며

잠적해버렸다. 파출소를 돌아다니며 양학선을 찾아 헤매던

오 감독은 경북 포항의 한 여관방에서 양학선을 발견했다.

 

 양학선은 다음 날 조용히 훈련에

복귀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양학선은

"그때 감독님이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다"고 털어놨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다"

방황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 양학선은 부쩍 철이 들었다.

어디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태릉선수촌

일일 훈련비 4만원을 모아 매월 80만원을 집으로 부쳤다.

오른쪽 어깨 인대가 끊어져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하루에

몇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고 어머니에겐 하루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얘기하는 살가운 아들이다. 경기도 일산 군부대에서

육군 하사로 근무 중인 형 학진(22)씨에게도

주말마다 면회를 가는 정도로 형제간에 우애도 남다르다.

작년 세계선수권에서 자기 이름을 딴 최고 난도의 신기술

'양학선'으로 우승했을 땐 외신 기자들이 "부모님도 체조 선수냐"고

묻자 "우리 아버지 농사짓는다고 농부라고 말해주세요"라고

거침없이 답했다. 통역을 맡은 트레이너를 통해

"His father is a farmer"라는 문장이 외신을 탔다.

 


어머니는 "부모로서 돈이 더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배웠더라면

우리 아기를 더 잘 뒷바라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양학선은 "운동이 힘들 때 부모님 얼굴을

떠올린다. 내가 방황할 때 너무 많이 우셔서 늙으셨다고

생각하면 채찍질이 된다"고 했다. 

 

 "아들이 집에 오면 가장 좋아하는 라면

'너구리'를 끓여줘야겠다"고 했다.

 

1080도를 회전하는 "양학선1" 고난도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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